어제는 25주기 5.18 광주 민중항쟁이었다.
5.18과 관련된 글을 쓰는 건 너무 힘들다. (사진명 : 신혼부부, 사진출처 : 5.18기념재단, 클릭하면 확대해서 볼 수 있음.)
내가 2살 때 전두환이 저지른 그 만행 때문에 아직도 많은 광주시민들이 아파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나의 가족이나 사촌 중에는 육체적인 피해를 입지 않았지만, 그 당시 광주시내에 살고 있던 사람이라면 모두가 정신적 피해를 겪고 있을 것이다.
어제는 5.18 광주 민중항쟁의 25주기였다. 17일 밤 전남도청 앞 분수대에서 진행된 5.18 전야제에 참석했었다. 하필이면 전야제 중에 많은 비가 내렸다. 마치 태풍이 몰아친 것처럼 강한 바람과 함께 내린 비가 행사장을 어지럽혔지만, 그 자리에 참여한 광주시민들의 발길은 쉽게 떠나지 않았다. 주변에 서서 비를 맞는 사람들의 얼굴은 눈물과 빗물이 교차했다.
내가 국민학교를 다닐 때만 해도 5.18은 폭동이었고, 간첩들의 음모였다. 사회시간 때 선생님께서는 교과서의 5.18 관련 단원만 수업하지 않으셨다. 물론, 아직도 타지역에서는 5.18을 폭동으로 생각하시는 어르신들도 있을 것이다. 이는 그분들의 문제가 아니다. 그 때만 해도 시외각으로 빠져나가는 길목을 전차로 가로 막고, 전화선을 끊고, KBS와 MBC 같은 방송사를 점거하면 어렵지 않게 진실을 은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 1980년 5월 18~22일자 국내신문에는 5.18과 관련된 기사를 단 한줄도 찾기 힘들다.
내가 국민학교를 다닐때만해도 홍콩할매귀신보다 더 무서운 소문이 있었다. 아직도 생생한 그 소문은 바로, 선생님 말 안듣는 학생들은 학교 뒷산에서 군인들에게 총 맞아 죽는다는 것이다. 내가 다니던 국민학교는 나주 방향으로 빠져나가는 광주 시외각에 위치했다.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내가 고학년일 때 실제로 학교 뒤편의 야산에서 5.18 관련 주검들 수십구가 매몰되있는 것을 경찰들과 시민들이 발견했다.
또한 내가 다니던 중학교는 화순 방향으로 빠져나가는 광주 시외각에 위치했다. 그곳에서도 집단으로 매몰되있던 주검들이 발견됐다. 5.18 당시 군인들을 피해 시외로 빠져나가는 사람들을 무참히 죽였던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내가 고등학교를 다닐때 학교 바로 앞에 미문화원이 있었다(-_-). 1학년때부터 3학년때까지 항상 최루탄 가스 속에서 전경들과 대학생들의 전쟁터를 뚫고 등교를 했었다. 특히 안기부의 박종철 치사사건이 발생했을 땐 등교시간이 오전 10시 이후로 연장됐던 적도 있었다.
내가 다니던 전남대학교는 5.18 민중항쟁의 근원지이다. 당시 대학 정문을 가로 막던 군부를 뚫고 시내 곳곳에 전두환 군사정권의 부당성을 알리던 대학생들이 나의 자랑스런 선배님들이다. 당시 총학생회장이었던 박관현 열사를 비롯해서 무수한 대학생들이 죽었다.
광주의 대학생들이 데모를 많이 했던 이유는 이러한 선배들의 정신 때문이리라.. 오히려 데모하는 학생들을 숨겨주고 도와줬던 광주시민들 때문이리라.. 다행히, 요즘은 거의 데모를 안한다.
아무래도 글을 쓰다보면 끝이 없을 것 같다. 근래 몇일동안 밤마다 TV에서 5.18과 관련된 프로그램을 방영했다. 집에 들어 올때면 어김없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TV 앞에서 술을 드시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몇일이 지나야만 두분께서 편한 잠을 이룰것 같다.
정말.. 5.18 관련 글을 쓰는 건 어렵다.
그들을 용서할 생각 따윈 없다. 광주시민 모두가 그들과 그날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지난 몇일 동안 5.18과 관련된 글을 써주신 수많은 블로거님들이 있기에, 그들은 이미 살아도 산것이 아니라 죽은 것과 같다.